FEWK; 0007k(실마리 #4) 매팅
한칸은 이미 늦었음을 직감했다.
태백숲. 밤새 흑공이 분출된 리버힐의 깊은 구역. 생존자 구조 작전은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폐건물에서 발견된 녹화테이프 한 개가 그의 운명을 바꿔버렸다. 야전교수로서 그는 지식이 곧 무기라고 믿었고, 신전사들과 생존자들이 대피하는 동안 홀로 테이프를 심상재생했다.
심상재생.
보통 영상은 스크린을 통해 보지만, 심상재생은 다르다. 영상의 내용을 직접 감각으로 체험하는 방식이다. 기억을 불러오듯 재생되는 방식이라 더 선명하고 강렬하다. 덕분에 그는 현실에서 테이프를 틀어보지 않아도 그 안의 내용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곧 그는 자신이 얼마나 경솔했는지를 깨달았다.
화면 속에 미명존재가 있었다.
미명존재.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 그 형체는 흐릿했지만, 단순한 노이즈나 영상의 오류가 아니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본능이 반응했다. 인간이 마주할 필요 없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느끼는 감각.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공포 이상의 것이었다. 한칸은 그 순간 알았다.
물적각성이 일어났다.
기록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매우 특정한 경우, 기록은 현실과 동일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를 물적각성이라고 부른다. 기록된 사건이 물리적으로 재현되거나, 감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즉, 테이프 속 영상이 그의 감각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매팅?”
그의 전문 연구 분야였다. 미지각성. 혹은 암중독.
보통 초월적 존재와 접촉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하나는 샤이닝(광중독), 다른 하나는 매팅. 샤이닝은 드물게 특수한 능력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매팅은 오직 괴수화 혹은 그보다 끔찍한 것을 의미했다.
한칸은 손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손끝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감각이 뒤틀리고, 피부 아래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과정을 통해 기술이나 능력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살아남을 확률은 절반. 나머지 절반은…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평소 ‘쓸 일이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던 돌칩 권총이 손에 쥐어졌다.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현실감을 주었다.
남은 시간, 10분.
매팅은 단순한 감염이 아니다. 몸의 변이가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개입하는 현상이다. 그는 연구자로서 이 과정을 알고 있었고, 이론적으로는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전혀 달랐다.
신경세포들이 뒤틀리는 감각이 시작되었다. 감각 과부하. 두개골 내부가 비틀리듯 통증이 퍼졌다. ‘이건 지식이 아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테이프 속에는 ‘어떤 전문가들’이 담아둔 특별한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한칸은 10분 안에 스스로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혹시라도 버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사이에서 망설였다. 돌칩 권총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 하나조차 내 것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오면, 과연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까?
“…제발.”
그의 시야가 흐려졌다. 목 안쪽에서 거품이 이는 느낌이 들었다. 안구가 말라붙고, 귀로 흘러 들어오는 소리가 이질적으로 변했다. 이미 몸의 절반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남은 시간…
참조 설정
✅ 심상재생(心象再生) : 기록된 심상을 감각적으로 재생하는 기술.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까지 포함해 체험할 수 있어, 교육, 증거보존, 초자연적 현상의 기록 등에 사용됨. 숙련된 재생사는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기록을 읽을 수 있다.
✅ 미명존재(未名存在) :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초자연적 존재. 일반적인 괴수와 달리 흑공, 신기, 또는 미지의 요소에 의해 형성되며, 존재 자체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러너들은 이를 ‘아주 고약한 것을 교수들이 점잖게 부르는 말’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 물적각성(物的覺醒) : 기록된 정보나 사물이 특정 조건에서 현실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 보통 인격이나 작위가 가미된 물건에서 발생하며, 접촉하는 순간 강제적인 각성이 일어날 수 있음. 샤이닝(광중독)과 매팅(미지각성)으로 구분된다.
✅ 매팅(Matting, 미지각성) : 초자연적 존재나 물적각성에 의해 발생하는 변이 현상. 샤이닝(광중독)과 다르게 능력을 부여하지 않으며, 괴수화되거나 더욱 끔찍한 변형이 일어남. 매개체에 따라 증상이 달라지며, 생존율은 50% 미만.
✅ 돌칩 : 신단석에 일정한 회로설계가 들어가 특정한 기능을 하는 도구이다. 돌칩은 신단석을 도안이나 회로설계 가공한 것으로 돌멩이 + 컴퓨터칩 같은 느낌의 신기 메카트로닉스 부품이다. 신호연결 기술에 쓰이기도 하고, 배터리 혹은 특수용도의 에너지를 저장하는데 사용한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돌칩 권총의 탄환 용도
✅ 돌칩 권총 : 돌칩을 탄환으로 사용하는 특수한 무기. 물리적 살상력은 낮으나 흑공과 신수에 반응하여 변이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돌칩의 종류에 따라 특수한 기능을 가지며, 러너들에게는 필수적인 기본 장비로 여겨진다.